생수 Livingwater
사랑의 기술 3 자신을 끌어안으라!
The Art of Loving III: Embracing Yourself as God did.
롬 7:15-25: 눅 15:16-24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롬 7:15-25)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였다. '어서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눅 15:16-24)
제 막내 동생이 군대 가기 전 휴학하고 10개월,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에 10개월 저에게 와서 영어공부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식사할 때마다 삼촌인 제 동생이 조카인 제 아들 현택이에게 늘 잔소릴 했습니다. “현택아 밥 먹을 땐 쩝쩝 거리지 말고 먹는거야!” 아마 현택이가 소리내서 밥 먹는 것이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들어보니 정말 현택이가 소리 내서 밥을 요란하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쩝쩝거리며 먹지 말라고 조카를 타이르던 삼촌은 더 많이 쩝쩝 거리며 먹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나의 행복/ 사랑은 나의 불행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림자 /그대 눈동자/태양처럼 빛날 때/나는 그대의 어두운 그림자 /사랑은 나의 천국 /사랑은 나의 지옥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림자 여러분, 패티김이 부른 빛과 그림자라는 노래입니다. 야간대학 다닐 때 지도 목사님이 어느 회식자리에서 부르시는 것을 듣고부터 좋아하게 된 노래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이 노래의 의미가 참 깊습니다. 물론 박건호씨가 가사를 쓸 때 그런 깊은 의미를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랑에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것만은 탁월한 통찰입니다.
양지바른 날 그림자가 더 선명하게 나타나듯이 우리 인생은 그림자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 빛과 그림자는 우리들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마치 자석의 양극이 서로를 당기듯이, 어떤 일이든 자주 되풀이하다 보면 그 극성도 함께 나타납니다. 외모에 지나친 신경을 쓰는 사람은 내면의 성숙을 이루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은, 그만큼 죽음에 대한 걱정이 크다는 것입니다. 허풍쟁이일수록 불안감과 스스로의 초라함을 크게 느끼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숙녀가 앵무새를 구입했는데 두 마디 아주 또렷하게 했습니다. “껴안고 키스하자. 껴안고 키스하자.” 앵무새가 계속 그 말만 반복하자 옆집에 사는 목사도 민망했던지 앵무새를 구입하고는 “우리 눈감고 기도합시다”라는 말을 가르쳐서 숙녀 앵무새 새장에 넣었습니다. 껴안고 키스하자는 앵무새의 말을 바꿔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랬더니 숙녀의 앵무새가 “껴안고 키스하자.” 목사의 앵무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기도가 이뤄졌다.”
아무리 우리가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하여도 아이는 부모의 그림자에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의식적인 가르침 보다는 무의식적인 그림자에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가진 그림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거친 생각이 거친 말을 낳고, 거친 말이 거친 행동을 유발하고, 거친 행동이 불행한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그 그림자를 인식하고 잘 다루면 찬란한 빛을 더욱 빛내는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줄수 있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화가 있으면 그 뒤에는 복이 따르고, 복의 그림자 속엔 화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모든 것은 두 줄기로 꼬인 밧줄처럼, 반대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림자를 품어 주는 것입니다.
탕자는 집을 나왔습니다. 자기것을 다 챙겨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왔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망했습니다. 거지가 되었습니다.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아버지와 집을 생각했습니다.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차마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지만 굶어 죽지 않으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끌어 안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혼날 줄 알았던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됐지요. 사랑을 알았다면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는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림자를 안으니 빛이 임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자를 무서워하고, 그림자 때문에 마음이 상해 둘 다를 떼어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방법은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는 일어나 달렸습니다. 그림자는 조금도 어렵지 않게 그를 따라 잡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스스로가 충분히 빨리 달리지 아니했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빨리 달려 쉬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그는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림자는 그늘속으로 들어가면 없어집니다. 빛가운데로 나오면 그림자는 선명하게 생깁니다. 빛은 그리스도요 그림자는 죄악입니다.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그림자는 사라지고, 또 앉아 조용히 머물러 있다면 더 이상 발자국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추한 모습들을 자꾸 감추어 두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을 무척 미워합니다. 모든 갈등은 우리의 무의식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면서 생긴 것입니다. 본시 그림자는 우리가 보기 싫어서 무의식에 가두어 버린 것인데, 누군가가 이것을 들추어 내면 화가 납니다.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화가 납니다. 그 사람을 보면 평소에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애써 외면하던 열등감이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어 어떤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들고 미워합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림자가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화가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나대어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바로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자석은 같은 극끼리는 강하게 저항합니다. 내 안의 그림자가 나를 지배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품어야 합니다. 친구로 만들어야 합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잘 달래어 같이 살아야 합니다. 인정하고 품어야 그림자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닙니다.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림자는 없어집니다. 내가 싫어하는 그림자를 품으면 그림자는 없어집니다.
저희 집은 항상 어지럽습니다. 누가 온다고 하면 전쟁이 벌어집니다. 여기저기에 쑤셔 넣어 말끔하게 감추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내 자신의 추한 모습들을 잠재의식 속에 처박아 버립니다. 괜히 어떤 사람을 보면 미워지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은 거울에 비친 내 ‘무의식의 그림자’가 비친 것입니다. 밉고 싫어서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 버린 바로 내 모습이 나타나서 짜증나는 반응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미운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품고 있는 것들이 미운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싫어하고 미운 사람은 내 자신의 내면을 알게 하는 스승이며 은인인 셈입니다. 거짓 자아를 발견하여 정화해서 참 자아를 깨닫게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밉고 악한 사람이라도 내 자신처럼 사랑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그림자속으로 들어가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독수리와 같습니다. 그림자와 빛에 쌓여 착한 일도 많이하지만 때론 지독히도 비겁하게 될 때도 많습니다. 독수리가 쇠사슬에 발이 묶여 많은 세월을 보내다 자신은 날 수 없다고 좌절해 버린 것과도 같은 운명입니다. 힘차게 날갯짓을 하면 푸른 하늘을 날 수 있으련만 비정상을 정상으로 알고 익숙하게 살아갑니다.
그림자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 속에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억눌려왔던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지닌 두려움을 만나는 것입니다. 참 자아와 대면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억압되었던 그림자가 타인에게 투사된 내 자신과의 만남입니다. 그러기에 참 자아를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원형이시기에 주님 만나 닮아 가는 것이 참된 자아를 찾는 지름길이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도 빛과 그림자에 쌓여 살았다는 것은 로마서 7장에서 읽었습니다. 빛과 그림자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피할 길 없습니다. 모든 동화의 주제는 바로 이 그림자를 끌어 아는 얘기입니다. 미녀와 마수의 이야기도 미녀가 마수를 끌어 안아 왕자로 변한다는 얘기이고, 피터팬도 그림자를 끌어안는 얘기입니다.
목사의 가장 큰 임무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잘못된 이유로 고통을 당하지 않게 막아 주는 것, 어리석은 이유에서 고통당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훈련은 고된 훈련입니다. 자기에게 빠져 있다가 자기에게 빠져 나와 자기를 바라보는 것 고도의 집중과 기술을 요합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라봅니다. 자신이 어떤 느낌속에 빠져 있는지 알아 차립니다. 자신이 어떤 걱정과 근심이 있는지 가만히 살펴 봅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그림자가 무엇인지 찾아내어 달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숱한 밤을 지새운 바울은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지켜 본 다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반복하고 싶지 않은 습관들, 원치 않았던 말실수, 원치 않는 순간에 원치 않는 장소에서 원치 않는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이러는 내가 정말 싫다!" 잘하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일은 더 꼬이고 관계는 더 비틀어집니다. 그리고 좌절합니다. 절망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려합니다. 자신의 불안으로부터 또는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도망치려는 것들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고 빨리 달렸지만 뒤돌아보기가 무섭게 그림자도 따라와 있었습니다. 쓰러져 죽을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며 달렸지만 끝내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내면의 갈등을 외적으로 풀고 도망치려고 술을 마시고 약물을 복용합니다. 그런다고 내면의 불안과 죄의식이 없어지지 않고 더욱 더 커집니다. 인간은 허약하고 미천한 존재이기에 쉽게 죄에 빠집니다.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자신과 화해하고 나서, 있는 그 바탕에서 자신이 자신이기를 수용하면 참 자신과 만나게 되어 그 실체 안에서 비로소 변화와 성장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떨쳐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림자를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멈춰 서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림자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컴퓨터 성능이 좋아도 바이러스가 들어와 시스템을 감염시키면 성능이 뚝 떨어지거나 작동이 아예 안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라 해도 죄에 눌리고 그림자에 치여 영혼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피폐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같이 죄를 범하고 아내에게 책임전가 하는 남자답지 못한 아담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로 동생을 죽인 아담, 술 먹고 아들 앞에서 치부를 드러낸 노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비겁한 아브라함,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 권을 빼앗은 파렴치한 야곱,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안하무인이었던 요셉, 동족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이집트인을 죽이고 모래 속에 파묻고 도망친 모세, 동생모세를 시기하다 문둥병에 걸린 미리암, 거짓 선지자를 토벌하고도 자살을 꿈꾸던 엘리야, 대머리라고 놀리는 아이들을 곰이 나오게 해서 죽게한 어이없는 엘리사, 자기에 충성한 부하의 아내를 겁탈하고 은폐하고자 충복을 죽인 다윗, 수 천 명의 후궁을 두었으면서도 변변한 사랑한번 제대로 못한 솔로몬, 하나님 주신 힘을 술과 여자에게 다 써버리고 눈 멀어 버린 비참한 삼손, 혈기부린 베드로, 의심많은 도마, 스데반과 초대교인들을 죽이는데 앞장 선 살인자 바울,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바울은 또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이 사도가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정상이 정상인듯 보입니다. 맞습니다. 비정상이 정상입니다.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병동과 감옥에 많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비참하게 끼어 있는 존재라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정상인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야단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인정해 주라는 겁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라야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수 있게 주님이 내게 큰일, 곧 용서와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고 감싸안을 때, 거기에서 은혜가 시작됩니다. 회복이 일어납니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은총의 순간인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바로 우리가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비정상이라고 생각되는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아픔과 상처가 너무 커서 그 고통이 너무 아프고 짐이 무거워 이제 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비정상, 그것이 정상입니다. 로마서를 우리에게 쓰고 있는 살인자 바울도, 바울의 글을 읽고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도 다 비정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부터 입니다. 완전하고 흠이 없는 에덴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 때 우리의 신분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 그것이었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정상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불행하게도 대단히 짧았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상태인지 이제는 도무지 기억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기억 상실증에 걸려 버린 것입니다. 정상의 상태를 정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것, 정상을 정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정상이 아닌 즉 비정상을 찾아서 나선 것, 그것이 아담의 죄입니다. 선악을 알게 되면, 내가 하나님이 되면, 정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 비정상적인 생각이 바로 우리의 죄요 잘못입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들과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본인들은 다 정상이고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자기가 정말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 안에 두 가지, 하나는 자기의 정상적인 그래서 친구라고 부를 수있는 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의 비정상적인, 그래서 나의 적이라고 부르는 이 두 가지 나가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링컨이 자기 결혼식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 우울증과 긴장, 걱정으로 손님들과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결혼식에 가지 못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결혼식을 올린 것을 아십니까? 마더 테레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기에 죽고 싶다고 고백한 그 고통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 그 바울 사도의 비참함, 그것이 바울 사도를 바울 사도 되게 했습니다. 보잘 것없고 상처 많은 우리들, 실수도 많이하고, 화도 잘내고 질투도 하고 원망도 하고 때로는 거짓말도 하는 사람이 바로 납니다.
우리는 모두 비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비정상인 것을 야단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인정해 주는 순간 우리는 일어 설 수 있습니다.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안에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이 동시에 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때로 나는 선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악한 것에게 지고 만다는 이 비참함 까지 인정하면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낭패. 좌절 그리고 회한의 순간에 존재의 뿌리이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어두운 영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그곳, 부서진 가족관계로 인해 안타까워하고 있는 그곳, 부평초처럼 허공에 뜬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바로 그곳이 바로 축복의 자리입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또는 비참하고 고통스런 현실, 짙은 어두움은 비록 우리 부족함과 허물 때문에 형성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은총의 통로로 이용하십니다. 어둠이 짙으면 짙은 만큼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 옆에 더욱 가까이 계시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습니다. 그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습니다. 그가 말을 더듬는 것이 사촌동생이 말을 더듬어 우습고 재미있어 자꾸 따라 하다보니 그보다 말을 더 잘 더듬게 된것입니다. 부모님은 몹시 걱정하셨습니다. 사내는 어디서고 말을 잘 해야 하는 법인데 자식 하나 못쓰게 되었다고 한탄하셨습니다.학교에서 책을 읽기만 하면 아이들이 웃어댔고 심부름하나 변변하게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대학을 나오고 지금 영어 선생이 되었습니다. 무슨일이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어느 날 주눅이 되어 살던 그를 부르셨습니다. 교회의 종소리는 늘 조롱과 놀림을 당하고 있던 그를 품어 주고 끌어당겨 위로해주었습니다. 종소리만 들려오면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일요일이면 나무하러 산으로 가야했습니다. 산 위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또 어떤 날은 종소리를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곤했습니다. 부모님은 두 지게분량의 땔감을 구해오는 조건으로 교회에 가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새벽녂에 일어나 어김없이 약조한 땔감은 해놓고 교회로 달려갈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마음의 평온을 느꼈고, 모든 것이 그의 눈에는 아름답게만 보였습니다. 이야기로 된 성서를 두 번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6개월 후 함박눈이 쏟아지던 어느 날, 목사님께서 그를 중국집으로 불러내어 자장면을 사주시면서 "초등부 학생회장을 맡아 달라" 하셨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내일 교회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펑펑 쏟아지는 눈 속으로 떠나가셨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회장이 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놀림만 당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때문입니다. 먼동이 틀 무렵, 이상하게도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입을 열 때 내가 도와 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리라." 이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 꽂혔고, 눈물이 뚝 멎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교회로 갔습니다. 사람 들의 그림자만 봐도말을 걸어올까 봐 가슴이 뛰곤 했는데, 말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단상에 오르자 300여 명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습니다.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뭐라고 취임사를 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확실한 것은 말을 꽤 길게 했는데 단 한마디도 더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그에게 하나님은 살아역사하시는 분이요, '위대한 의사'요, 친구로 다가 오셨습니다.
한 아이가 조상때부터 내려오는 값진 도자기를 깨뜨렸습니다. 아이는 그 도자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에 아이는 사색이 되어 떨다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급히 뛰어 들어 왔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던 아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안심을 했습니다. “네가 많이 다친 줄 알았잖아!” 두팔로 아이를 감싸며 눈물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 날 저는 제가 가족의 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먼 훗날 건강하고 보물처럼 아리따운 숙녀로 자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림자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죄를 용서하며 공허함을 채우고, 관계를 회복하여 주십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박희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