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군 용안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리는 강경으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에 의뢰하여 단순에 가는 그런 이사가 아니었다.
한달이 걸렸는지 서너달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의 이사짐이 실린 수레를 밀고 수도 없이 용안과 강경을 오고 갔다.
그 결과 발에 물집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 낳을 줄 았았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다.
고통스러웠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병원에 갈 형편이 못 되었다.
어머니는 그 때 강경 천주교회에 나가셨다.
내가 아파서 나가기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간호원 수녀님을 만나 천주교회에서 수술을 받았다.
치료실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수녀님 사무실에서 앉은 채로 마취도 없이 칼을 들이대던 수녀님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수녀님은 수술 전에 설명을 했다. 참아야 한다고.
다정하게 설명을 하시면서 칼로 발의 물집을 제거하시던 수녀님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이후로 얼마 동안 강경 성당에 다녔는지 모른다.
때때로 가슴을 치면서 "내탓이요. 내 큰 탓이로다" 라고 말하면서 회개 기도를 드리곤 했다.
어머니를 따라 다니던 나는 성당에 그리 큰 재미를 붙이지는 못한 것 같다.
오래 되지 않아서 어머니를 따라 또 다른 종교 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성덕도라는 곳이다.
무량청정정방심이라는 주문을 30분 이상 외우면서 매 주일 집회가 열였다.
한량없이 맑고 고요하고 바른 마음이라는 뜻이다.
성덕도 포교사가 정좌하라고 외치면 주문을 중단하고 강의를 듣는다.
아주 짧은 고사성어처럼 생각되는 문구를 칠판에 써 놓고 설명을 했다.
그리고 나면 한 사람씩 일어나서 그 말씀에 대한 자아 비판을 한다.
의무 사항은 아니었지만 저들은 솔직히 자기 반성을 공개적으로 했다.
그리고 나면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그 후에는 포교사가 안수 기도를 했다.
우리 어머니는 이 안수 기도가 병을 고친다고 믿으셨다.
생각해보니 그곳에는 우리의 먼 친척도 다니셨다.
아마도 그 분들이 우리 어머니를 그곳에 소개하신 모양이다.
강경에서는 강경중학교에 다녔다.
집을 동흥동에 있었는데 강경중학교에 가려면 용안 가는 방향으로 한참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가난한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임태혁이라는 친구가 가장 친하게 지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 가슴 설레던 일은 초등학교 시절 함께 다닌 여학생을 길에서 만나는 일이었다.
용안과 강경 사이 구산리라는 동네에 살던 박월정이라는 여학생이다.
초등학교 시절 연극도 하고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좋아했던 모양이다.
강경에 갈 때마다 그녀가 살던 동네를 지나칠 때면 지금은 어디서 사는 지 알고 싶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