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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2): 이렇게 나를 사랑하라!

2:8-10; 8:31-37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8-10)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께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 8:31-37)


남편이 저녁을 먹다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음식도 잘 못하고, 자식 키우는 것도 신통치 않고, 그렇다고 돈을 잘 벌길 해, 예쁘길 해! 당신이 잘하는 게 뭐 있어!” 남편의 이 말에 아내는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아내가 잠시 시장 보러 나간 사이에 남편은 아내가 짤막하게 써놓고 나간 편지를 보았습니다. “여보, 내가 능력 있고 예쁜 여자였다면 분명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았을거예요.


여대생이 결혼 상담소장를 찾아와 멋있는 남자를 소개시켜 달라 했습니다. 어떤 남자가 멋있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단 잘 생겨야 합니다. 인류대학 출신에다 재력도 있어야 하고, 장남은 부담스러우니 중간이나 막내야 합니다. 바람둥이는 싫습니다. 당연히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고 중소기업정도를 운영하면 좋겠구요. 다정다감하고, 자상해야 합니다. 쾌활한 성격에다가 유머감각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여자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자 상담소장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런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아가씨는 어떤 소양을 쌓아왔는지 말해주세요. 그래야 딱 맞는 남자를 구해드리지요.” 여대생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자기 사랑 자기가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들은 말하는 습관이나 태도나 행동이 사랑받을 짓을 합니다. 앞에서 말하는 남편처럼 아내에게 모질게 말하는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러니는 이런 사람들이 더 인정받고 싶어 하고 더 사랑에 굶주려 있다는 것입니다. 더 굶주려 있기에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더 심한 말을 하고 더 못되게 군다는 점입니다.


최근에 읽은 책이 있습니다. 이외수씨가 쓴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라는 책과 티모시 윌슨이라는 쓴 “나는 내가 낯설다“라는 책입니다. 여자는 목매달아 죽고 싶어도 예쁜 밧줄이 없으면 죽을 수 없답니다. 여자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에게서 자동차 한 대를 선물로 받았을 때보다 사랑을 느끼는 남자에게서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로 받았을 때 더 큰 감동을 받지만, 결혼만큼은 장미꽃을 선물한 남자보다는 자동차를 선물한 사람과 한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쓰촨성 의 무너진 가옥에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품에 안고 엎드려 죽어 있는 여성과 죽은 엄마의 품에 안겨 있던 젖먹이는 숨을 쉬고 있었고, 포대기 안에서 휴대전화가 있었습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이 한 줄의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습니다. “널 사랑해, 사랑하는 나의 보배야, 만약 네가 살아남으면 꼭 기억해 다오, 내가 널 사랑했다고.” 어디 두 가지 마음이 여자만 있겠습니까? 남자도 마찬가지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잘 모릅니다. 알다가도 모를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내가 나에게 낯설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지요. 바울도 그랬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7:15) 프로이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빙산의 일각이라 했습니다. 티모시 윌슨이 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그 빙산 꼭대기에 살짝 쌓인 눈 정도라는 것입니다. 티모시 윌슨은 그 책에서 “자신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관찰자가 됨으로써 우리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나는 내가 낯설다.” 내가 나를 잘 모르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우리의 자아가 하나 이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화가 난 나를 보고, 변덕스러운 나를 보고 절망하고 후회하기 보다는 또 여러개로 나타나는 나를 인정하고 대면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전에 내 몸을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에베소서에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나와 본래의 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셨는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거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부인(self-denial)은 거짓된 나를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아 새사람된 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선물로 지어주신 우리의 모습을 거부하는 것은(self-rejection) 오해입니다. 자기 부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상, 사회가 형성해 놓은 가치관, 세상이 강요하는 생활태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은 자신을 존중하고 올바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거부하는 것이 자기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를 거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책감이요 또 하나는 수치심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것을 후회하는 것은 건강합니다. 사람이 지닌 하나님 주신 양심입니다. 자신을 거부하는 태도란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지금의 나에 대한 가능성까지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맨날 이 모양 요 꼴일까? 나는 되는 일도 없어!” 어렸을 때 야단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쓸데없는 죄책감으로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너 벌써 몇 번째냐? 그것도 못해? 네가 하는 일 늘 그렇지 뭐! 내가 너 때문에 얼굴 들고 못 다니겠어! 하는 일마다 말썽이니 ...” 사랑 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고, 부모에게 자존심에 심한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자기의 허물에 대해 너그럽게 용서해야 합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은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기 전에 자신의 허물도 너그럽게 봐주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스스로를 용납하는 체험을 하는 것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받는 첫 번째 지름길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그래, 과거에 실수를 많이 했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실수가 지금의 나는 아니야. 그것이 지금까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는 있지만, 나는 실수 자체는 아니다. 나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나를 끊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은혜로 구원받은 브랜드 뉴, 새 사람이다. 끊임없이 주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내가 저지른 실수는 인정하지만, 그 실수가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것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늘 에베소서에서 그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던 지금의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의 나는 브랜 뉴 하나님의 작품이요,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을 주신 목적은 귀하게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기쁜 소식이 어디 있답니까? 나는 귀한 존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튼튼하고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해도 무시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출신, 경제적인 조건, 학벌, 사회적 지위로 인해,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무시당하지 않는 튼튼한 마음입니다. 외모로 인해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종차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무시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욕을 하면 욕을 안 먹습니다. 물론 무시당하면 불쾌하고 분노가 일어 소용돌이 칠것입니다. 상처로 남아 오랫동안 마음의 평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이런 힘에 지배받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학벌, 재력, 사회적 지위, 능력, 외모 같은 외부적인 조건을 가지고 무시당하는 사람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무시하면 무시당하지 않을 힘, 욕을 하면 욕을 먹지 않을 능력,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겸손할 수 있는 것이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외적 조건이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생각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포장지만 보고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외부적인 조건들은 포장일 뿐입니다. 에베소서는 이런 외적 인간, 육에 속한 인간에 속지 말고 속 사람을 튼튼하게 하는 것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니까 사랑받을 수 없어. 나는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겼으니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어. 나는 배운 것도 변변치 않고, 가진 것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뚜렷하게 내 세울 것이 없으니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다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더 많은 조건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한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서,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많은 돈을 벌려고, 좋은 외모를 갖추려고 몸부림만 치는 한 자기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내가 이렇게 불행한 것은 저 인간을 잘못만난 때문이야. 제대로 된 남자만 만났다면, 제대로 된 여자만 만났다면 좋은 부모를 만났다면 내 인생 이렇게 꼬이진 않았을 터인데... 어저다 저런 인간 만나 생고생을 하고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나?” 아무도 “아, 내가 아직 사랑할 만한 훈련과 노력이 부족했구나. 내가 아직 사랑 할 준비가 되지 못했구나”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사랑할 사람만 만나면 사랑할 능력은 자동적으로 생길 것이라 착각합니다. 이것이 신기루인줄 모릅니다. 내 마음에 드는 대상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내게 맞는 사람이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을 학대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 귀한 줄 알아차리겠습니까? 어림도 없지요.


아리따운 여자를 기다리는 노총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에도 그리던 여자를 만났습니다.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 받을 줄만 알지 생전 줄 줄을 모릅니다. 점심값을 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큰 돈을 빌려 갔습니다. 또 빌려갑니다. 꿈에도 그리던 예쁘고 빵빵한 여자라고 계속 좋게만 보일까요?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피본 남자 많습니다. 멋있고 돈 잘 벌고 가문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불행한 여자 세상은 쌔고 쌨습니다.


저도 예쁜 여자에게 호감이 갑니다. 잘 생긴 남자, 있어 보이는 남자에게 마음이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서 볼 때의 일입니다. 자주 만나고 사람을 깊이 사귀면서 함께 살 배우자로, 함께 일한 동역자를 구할 때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람은 첫 인상이 중요하고 첫 인상을 바꾸는 데는 40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인상이 안 좋은데 40시간이 지나서 바뀌는 경우가 있지만, 드뭅니다. 대부분은 밝고 따뜻하고 깊은 맛을 주는 사람은 그냥 스며드는 법입니다. 밝은 인상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스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감출수가 없습니다. 외모가 출중합니다. 인상은 좋지 않습니다. 외모는 못생겼습니다. 인상은 참 좋습니다. 어떤 사람하고 살고 싶습니까? 화장한다고 감출 수 있습니까? 화장 따로 얼굴 따로면 어떡합니까?


설교할 때도 보면 얼굴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활짝 웃고 슬픈 얘기에는 울고 얼굴이 빛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품만 하시면서 한숨만 푹푹 내 쉬고, 시계만 쳐다보며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 중에 여러분의 인상이 바뀌는 것을 보는 것만큼 저에게 큰 상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참으로 행복한 경험입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무시당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존재, 천하보다 귀한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나를 무시하지 맙시다. 그것은 신성모독죄입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자기가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자신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만 올바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자기를 인정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린 시절 받은 심리적인 상처가 그 큰 원인입니다. 부모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온 사람들은 자신을 못난 사람, 무가치한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아무리 격려하고 칭찬하고 사랑을 건네줘도 끝내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기 거부내지는 자기 학대입니다.


겉으로는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를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에 내어버려 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못된 목적을 좇아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 우리를 향해 품으신 하나님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면서 칭찬 받고 인정받고 사랑 받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외적인 조건을 끊임없이 상승시키려 애를 씁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이 아닙니다. 결코 자기를 위하는 길도, 올바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결코 자신을 올바로 세우는 길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자신을 존중하고 올바로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를 거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를 긍정하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신앙입니다. 자기를 부풀려 남에게 과시하는 것 교만입니다. 겸손은 무조건 자기를 낮추고 뒤로 빼는 일이 아닙니다. 가장된 겸손, 부풀리는 교만은 모두 불신앙적이고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또한 자기거부가 아니라 거짓된 자아를 극복하는 일입니다. 거짓 자아를 부정하는 일은 우리의 ‘참 자아’(true self)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참 자아를 회복하는 일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참 자아란 결코 무시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하나님 형상 따라 창조된 원래 우리 모습입니다.


자기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칭찬을 감사히 받는 것입니다. 정성껏 차린 음식을 받고 감동받아 칭찬을 합니다. “음식을 많이도 차리셨네요. 음식맛도 참 좋습니다. 식당을 차려도 성공하시겠네요.” 대부분 가정주부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예요, 차린 것이 별로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언어의 습관부터 바꿔야 합니다. 칭찬을 하면 기쁘고 감사하게 받는 습관을 갖습니다. “고맙습니다. 맛있다니 제가 감사하네요.” “옷이 예쁘네요” 그러면 “3불짜리 밖에 안돼요.” 그러지 말고, “예쁘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상대방이 선물을 건네줄 땐 감사히 받아야 선물입니다.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뻐하는 것은 정직한 반응입니다. 흔쾌히 받아들이고, 감사하면서 죄책감은 건강한 자부심으로 바뀝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4:21-24).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기 원하시는 메시지는 단 하나,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더 나아가 그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를 무시할 수도, 부정할 수도, 짓밟을 수도 없습니다. 이 가치는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요 그분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한 조각의 퍼즐입니다. 누가 더 가치 있고, 누가 더 사랑스럽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을 우대합니다. 높은 사람을 우러릅니다. 똑똑한 남자, 능력 있는 남자를 선호합니다.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만 사랑합니다.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아직 신앙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입니다. 묵묵히, 감사와 기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감당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교회는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며, 서로를 보충하고 채워주며, 그래서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살아 있는 천국입니다. 자기 사랑을 거부하면 사랑으로부터 우리도 거부당합니다.


서두에서 아내를 타박하는 남편, 좋은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사랑의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이상적인 남성을 기다리거나, 아내가 변하기를 기대하는 무모한 사람들입니다. 행복의 문제를 자기를 만족시켜주고, 사랑해 줄 사람만 기다리는 일로 봅니다. 사랑을 훈련하고 연습해야 할 문제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사랑할 줄을 잘 모르는 구나! 나는 사랑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내가 만났던 사람들만 탓을 합니다. 그렇게 사는 한 삶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을 받을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에게 낯설 때가 많습니다. 여자가 여자를 모르고 남자가 남자를 모르고, 부모가 부모 됨을 모르고 목사가 목사 됨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들이 때론 자학인 경우들도 많고 착각하며 살기도 합니다. 자식에 대한 고착, 부부사이의 집착을 사랑으로 알고,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며 부질 없은 욕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만능, 지나친 경쟁사회에서 교회마저도 사랑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생존경쟁의 정글처럼 되기 쉽습니다. 동창회다, 회사, 교회다 해서 단단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토대는 매우 허약합니다. 공동의 이익이 맞아떨어질 때만 유지되지,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에서 자기 사랑은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의 기술은 자기용납, 자기용서, 자기와의 화해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사랑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시켜 줍니다. 사랑은 자신안에서 하나님 주신 최선의 것을 이끌어 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에라야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 내 형제를 바로 사랑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이 제일 좋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하고 무서운 것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젊음이 좋다지만 제 젊은 날은 무모한 자기 확신과 쓸데없는 허영심과 끝 모를 교만 때문에 얼마나 힘들게 살아야 했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잠 못 이루는 밤, 끝 모를 갈등, 불안, 초조, 외로움을 겪으며 심리치료사를 만나고, 영성수련이다 수도원을 전전했습니다. 또 자기개발서를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으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3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까지 저 자신과 싸우고 마침내 화해하고 부족한 저 자신을 끌어안고 나서야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제 자신을 깊이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자신을 용납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모태에서부터 우리를 사랑 받는 자로 부르시고

인생 여정의 고비길마다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의 귀한 은혜 다시한번 기억합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 기억하며

자신을 존중하고 올바로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죄악의 언저리 서성거리지 말게 하시고,

생의 한복판에서 당신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진리와 사랑으로 회복되어

힘있고 자신있게 남은 생애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참 자아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개회기도

예배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

한 주간을 은혜가운데 보내고

또 한 주간을 예배로 시작합니다.

흩어졌던 저희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였아오니

은혜충만 말씀충만하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근심걱정 해결 받게 하시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속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가 찬양과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시고,

우리가 들어야 할 주의 음성을 들려 주옵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2. 대중기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사랑의 하나님!

죄가운데 빠져 사람구실도 못하고

오직 세상욕심과 걱정에 빠져 살던 저희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을 받아

하나님의 작품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자신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웃도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듯 사랑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우리를

세상의 가치로 평가절하 하지 말게 하소서.

인생의 한복판에서 주의 형상 회복하고

진리의 말씀따라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세상에 속한 헛된 욕심일랑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풍성하게 살게 하소서.

빈 마음, 겸손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아 나온 저희들에게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저희들이 해야 할 사명을 깨닫게 하시며

매일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나눌수 있는 제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지나간 시간,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거룩한 뜻을 외면한 것도 사죄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저희 모두에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서 사죄의 피를 흘리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소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