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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사람들(1): 죽음에서 생명으로 (홍석환 목사)

  121:1-8 신 6:5-9; 사도행전 2: 22-24; 눅 24:1-6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라. 또 너희는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여라." 신 6:5-9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능력과 기이한 일과 표적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증언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 예수가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살리셨으며,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행 2: 22-24

 그러나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데, 보니, 남자 둘이 눈부신 옷을 입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여자들이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부인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눅 24:1-6

 꽃피고 새 우는 사월, 슬프도록 아름다운 봄이 왔습니다. 사월이 오면 T.S.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첫 구절이 생각납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왜 만물이 소생하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이 황홀한 사월을 왜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을까요? 천지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있는데 도대체 시인은 무엇을 보았길레 가장 잔인한 달로 느꼈을까요? 이렇게 생명이 약동하는 봄에 삶의 목적도 없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순수한 열정도 식어 버리고, 사랑의 능력까지 잃고, 그저 본능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에겐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이 황홀한 봄에 황무지처럼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사월은 정말 가장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습니다. 맛있는 것은 많은데 몸이 아파 먹을 수가 없다면,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데 죽어야 한다면, 돈은 많은데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지위는 높아졌는데 존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겠습니까?

 부활을 노래하지만 생명은 없고, 구원을 말하지만 사랑은 매 말랐고, 진리를 말하지만 정작 헛된 꿈만 쫒아 갑니다.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은 잔인한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여러분은 느끼십니까? 죽음을 이긴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속에는 스며 나옵니까? 생명을 가져다주는 부활의 빛은 어둠에 익숙한 사람에겐 너무 눈이 부십니다. 부활이 잔인한 것은 부활에 이르는 길이 십자가를 통한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거부하는 닫힌 마음 때문입니다. 닫힌 마음에는 사랑이 자리 잡지 못하고, 굳은 마음에는 생명이 자라나지 못합니다.

 이번 부활절은 저에게 참 힘들었습니다. 아무 감각도 없었습니다. 도망가고만 싶었습니다. 그래서 홍종욱 목사에게 부활주일 저녁 늦게 느닷없이 전화해서 부활이 뭐냐? 물었습니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던 모양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윤 민 사모님의 사건이 저에게도 큰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밤낮으로 그분을 도우려고 애쓴 스테반 사역자들을 위로하려고 제가 지나치게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수술이 잘되어 깨어났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는 비보가 날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권사님은 우느라 말을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이럴 때 열심히 돕느라 애쓴 교인에게 뭐라 위로해야 하는가? 그리고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부활절이 없었습니다. 도망가듯 볼티모어 수녀원으로 내려갔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주제는 위기에 처한 공동체에 어떻게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 할 것인가 하는 주제였습니다. 40여명이 모였는데 이것은 저만이 갖는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강사로 오신 분들도 이런 고민과 씨름한 분이었습니다.

 그냥 푹 쉬며 강의를 들으며 하나님을 믿으면 뭐가 좋은가? 깊은 신앙을 가지면 사는데 어떻게 좋은가? 부활신앙은 뭔가? 생각하고 기도하고 묵상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2장은 베드로 설교이자 초대교회가 선포한 신앙의 핵심입니다. 전문용어로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지만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초대교회 신앙의 요약이라고 합니다. 22절과 그리고 36절이 핵심, 케리그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38절,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입니까? 이것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고, 진리를 얻고, 사랑을 할 수 있게되어 행복한 인생을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처형당하고 다들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정치범으로 처형당한 스승으로 인해 제자들은 주눅이 잔뜩 들어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장례를 치르지 못한 예수님께 마지막 정성을 바치려 아리마데 요셉의 가족 묘지를 찾았습니다.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사서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라도 깨달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이상하게만 생각했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여자들을 맛이 간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깝게 죽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 후 모두 뿔뿔히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제자들은 이상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죽어 무덤에 묻힌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죽었던 예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도마는 그럴 리 없다고 완강히 부활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긱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바울조차도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태어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고전 15:3-8) 그리고 14절에서는 이렇게 결론을 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극적으로 예수님이 살아나시는 장면을 묘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영이 죽은 예수의 몸에 임하고, 세마포가 풀리고, 멎었던 뇌와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순간, 그리고 눈을 뜨고 일어나 앉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면 믿기에 좋을텐데. 그런데 성경은 부활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없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단순합니다. 무덤에 묻혔고,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만 보도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죽음상태로 들어갔다가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부활의 몸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문이 잠겼는데도 나타납니다.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는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의 시체를 어디에 감췄느냐며 울었습니다. 도마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허망하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실망하여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서로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집에 들어가 축복하시고 빵을 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그 예수님이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유령도 아니고, 실제 사람도 아니고 도대체 부활하신 예수님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제자들이 관리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는 또 갑자기 사라집니다. 유령인가? 진짜 예수님인가? 구분이 안 됩니다. 부활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습니다. 물질세계에 사는 우리가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부활의 몸은 어떻게 생겼나? 모릅니다. 그러니 예수님 부활이 꾸며낸 거짓말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라진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꿈인지 생신지, 진짠지 가짠지는 알 수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에게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길가에서 말씀을 풀어 설명하실 때 듣는 제자들의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빵을 떼실 때는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는 실망하여 낙향하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주님을 뵈었다고 증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뵙고는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불신이 믿음이 되었습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바른 마음, 밝은 얼굴로 변했습니다. 차겁게 식어가던 마음이 뜨겁게 달아 올랐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면서 대낮에 술취한 사람이라고 사람드은 오해했습니다. 만일 유령이나 환상을 보았다면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냐 가짜냐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심리적인 착각인지 유령을 본 것인지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어떤 변화냐? 내 안에서 시작된 사랑입니다.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지옥이며 저주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인간 존재의 고유한 핵심입니다. 구원이란 서로 사랑하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힘을 발견했다는 것이고 이제 그 사랑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합니다. 사랑을 하면 하나님을 느낍니다. 사랑하면 믿음이 생기고, 의심이 사라집니다. 실망한 제자들이 지나가는 길손에게 빵을 나누면서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외로움을 해결하고, 절망을 벗는 것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공동체 속에서 발견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남들이 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그 일들이 크나큰 축복이 됩니다.

 행복하게 사는 길은 돈을 더 많이 버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조금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도 오해입니다. 원하는 일을 성취하는 일은 잠시만 행복하게 합니다. 행복의 비결은 지금 이 순간 눈을 활짝 뜨고 내가 살아 있을 의미를 찾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1960년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예일 하버드에서 가르치며 베스트 셀러가 된 50권의 책을 집필하며 가장 영향력 있는 영성작가가 된 헨리 나웬 신부,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웬지 고독이 깊어만 갔습니다. 세 가지 때문에 늘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더 힘을 갖고, 더 위대해 지려는 끊없는 욕망, 지치지 않는 욕심이었습니다. 1986년 토론토 라르슈 공동체에 초대받은 것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장애인들과 함께 한집에 생활하면서 중증장애인 청년 아담을 돌봤습니다. 아담은 혼자 말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아침마다 몇 시간씩 목욕을 시키고,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였습니다. 그를 아끼는 친구들은 능력 있는 쓸모없는 아담에게 묶여 아까운 재능을 썩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나웬신부는 회심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따르고 만나고 싶어하는데도 아담은 자신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 무조건 사랑받는다는 것이 뭔지 정신 박약아 아담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우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안락하고 사치스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가장 비참해질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고 죽어 천당을 가는 축복도 있지만, 예수님은 가는 천국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다가오는 천국을 더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가질 이유와 어떻게 희망을 갖고 살수 있는가?

 한 치 앞의 희망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절망 속에 있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밝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공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한 인생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승진하고, 출세하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도 비참하게 된 사람들, 외롭게 사는 이들이 수두록 합니다.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말라고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예수를 무덤에서 일으킨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된 한 사람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이 뭔 줄 압니까? 좀 더 모험하지 못한 것,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이랍니다.

 천지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봄이 왔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사월에 생명을 피워내지 못하고, 사랑을 못하는 인생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 천지에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는 사월에 부활을 느끼지 못하면 차라리 잔인한 세월입니다. 부활을 노래하지만 생명은 없고, 구원을 말하지만 사랑이 매 마르고, 진리를 말하지만 정작 헛된 꿈을 쫒아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하던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축복하시고 부활의 능력, 성령을 받으라 하십니다. 자신의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망의 늪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 마음의 문을 꽁꽁 잠그고 두려움 속에 사는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시어 평화를 주시고, 성령의 온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부활의 영, 성령을 받아 누리면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이 생기고, 나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고, 그 사랑의 물결이 내 영혼을 뒤 덮습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치고, 나도 어쩌지 못하는 평화가 스며들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시작되면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만져 주십니다! 내 아픔은 치유되었고, 내 슬픔은 아름다운 노래가 됩니다." 그래서 세상 곳곳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 보입니다.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 부드러운 풀과 새들이 보입니다. 자연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부활을 모르는 인간은 어둡고 칙칙하고 어리석습니다. 삶이 곧 천국인 것을 모릅니다. 부활의 영이 있는 곳은 아름답고, 서로를 끓어 안고 울 수 있고 웃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빛 가운데서 바라보는 만큼 행복해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베드로의 설교, 초대교회의 확신은 이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예수, 아리마대 요셉의 돌무덤에 장사되었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증언을 합니까?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의 마음에 남겨진 흔적이 그 근거입니다.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의 경험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와 우리 삶에 일어난 사랑이 그 근거입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이 증거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부활의 소식은 가짜처럼 느껴지겠지만 진짜 중에도 진짜입니다. 찬송가 151장에서 작가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구요? 내 맘에 살아 계시거든요!"(You ask me how I know He lives. He lives within my heart).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부활의 능력과 성령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