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 Livingwater

사랑이란 무엇인가? (홍석환 목사-북부 보스톤한인연합감리교회)
요일 4:7-12; 요 15:11-1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 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 다.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큰 병원의 의사 한분이 어느 날 저녁 아주 매력적인 여자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다가가 물었습니다. “참 아름다우십니다. 제가 어디선가 뵌 적이 있지요? 학회에서 뵈었나요?” “아닌데요!” “아, 캐러비언에 여행 중에 뵌 것 같은데, 그렇지요?” “아닌데요!” “그럼 제가 어디서 뵈었나요?” “선생님, 전 매일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일하시는 외과병동의 수간호원입니다.” 기능과 효율만 중요시하는 세상에서 인격적인 만남이 사라진 모습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깊은 만남을 외면한채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가수 나훈아씨가 히트를 친 노래입니다. 사랑이 무어냐? 유행가 치고는 참 큰 질문입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문학이나 예술, 종교의 목적이 이 대답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문호들과 사상가들이 사랑이라는 주제를 안 건드려본 사람이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사랑을 네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아가페'와 '필리아,' '스토르게'와 에로스'가 그것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에로스, 형제간의 사랑이나 우정은 필리아, 또 부모의 자식 사랑은 스토르게, 모두 '좋아하다, 인정하다'는 뜻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이건 막론하고 모두'짜릿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훈아의 노래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 합니다. 사랑은 '원래' 괴롭고 힘든 것이라는 동양 사람들의 사랑이해입니다. 한자의 '사랑 '愛'자의 맨 윗 부분은 '목메일 기'자입니다. 음식을 삼키다가 목에 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태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마음 심'입니다. 맨 아랫부분은 '뒤져올 치'자입니다. 다리에 무거운 것을 달아서 질질 끌면서 간다는 뜻입니다. 한자의 사랑애자는 마음이 메이고 무거운 짐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는 상태, 아무리 목이 답답하고 숨 막혀도, 아무리 무거워도 풀어내 버리면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서양에서 사랑은 '짜릿하고 좋은 것'이고 동양에서의 사랑은 ‘견디며 버티어나가는 것’ '힘들어도 꼭 참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일서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선언하고,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명령하십니다. 사랑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너무 추상적이고 사랑하기는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도대체 사랑이 뭔가요? 그냥 좋아하는 것? 보고 싶은 것? 소유하고 싶은 욕망? 사랑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많이 쓰면서도 사람마다 그 의미는 천차만별입니다. 통속적인 사랑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먼저 통속적인 사랑,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사랑이 아닌 것부터 살펴봅니다.
첫째,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의지적인 행동이나 의식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종족을 보존하고 일시적인 자아 영역 붕괴를 일으키는 성적충동이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두 연인이 사랑에서 빠져 나올 때부터 비로소 참사랑이 시작됩니다. 눈에 콩깍지가 쓰이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잊고 환상적이고 유아기적인 결합과 퇴행일 뿐입니다. 꽁깍지가 떨어져 나가고 제자리로 돌아오면 곧 환멸을 느끼고 맙니다. 참 사랑은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린아이가 자신과 엄마를 구분하지 못하는 유아기로의 퇴행입니다. 참사랑은 정신을 고양시켜 주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방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환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결혼의 미망에서 깨어나와 2-3년의 기간 동안 지옥 같은 현실을 대면하면서 사람들은 현실로 깨어 나옵니다. 그때부터 비로서 성장의 기회로 삼아 깊은 사랑으로 갈수 있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며 참사랑의 크고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계기를 만들어 줄 뿐입니다.
사랑은 의존적인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필요성일 뿐입니다. 사랑은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상대방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잘 살기 위해서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누구나 나를 엄마처럼 보살펴 줄 수 있는 아내를 찾고, 나를 아빠처럼 사랑해 줄 수 있는 남편을 찾습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그런 엄마 같은 여자, 아빠 같은 남자는 없습니다. 있다면 비정상이지요. 내 남편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내 아내는 내 엄마가 아닙니다. 사랑을 잘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어떤 굶주림이 있고, 어떤 공허함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상대방을 통해서 채우려고 하면 의존관계가 되고 이것은 성장을 방해하고 사랑이 아닌 집착을 낳게 됩니다.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면 사랑받 만한 사람이 영영 될 수 없습니다. 자기만 보고 사랑하게 만들려고 메어두려는 사람은 사랑이 아닌 집착에 빠지고 맙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자유 와 성장을 가로막습니까? 사랑은 독립적인 두 사람 안에서 일어나지, 의존적인 사람에게서는 끝없는 집착만 있을 뿐입니다. 돈을 벌고 권력을 얻고,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치면 “사랑스런 사람”이 못됩니다. 애완동물에게 먹이고 목욕시켜주고 만저 주고, 안아주고 훈련시키고 놀기도 하고 개가 아프면 의사에게 달려가고 죽으면 통곡을 합니다. 동물에게 자신을 투사시키고,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듭니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이유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내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독립시키고, 상대방의 성장을 돕는 일이지 나를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둥지를 떠나 독립시켜야 하는데 부모를 의존하게 만들거나 종속시키려는 시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종속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하게 하고 성숙하게 돕는 일입니다.
사랑은 또 희생이 아닙니다. 한국 부모님들이 많이 갖는 환상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을 했는데 네가 나 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서운해 합니다. 그분들은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보험을 든 것입니다.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보상을 받으려고 투자를 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냥 베푸는 것이고, 베푸는 것 자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 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거나, 내 사람 만들려고 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사랑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고, 상대방의 성장을 돕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사람을 만들려고 했거나 투자한 셈이지요. 그것을 미끼로 그 사람을 내게 매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사랑이 아닌 것은 절대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낭만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우리는 싫어하면서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우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면 오히려 과보호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정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집착과 사랑을 혼동하지 맙시다. 집착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힘들게 하고, 나를 떠나갈까봐 두려워하고, 상대방의 성장을 두려워합니다.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의존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자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싫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책임과 지혜를 동반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느낌이라기보다는 책임지려는 의지입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멋있는 남자를 보고 남자든 여자든 매력을 느끼고 끌리는 것은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그렇지만“나는 당신에게 끌리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결혼한 아내 혹은 남편이 있고 돌보아야 할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느낌과 사랑을 혼동하여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행동하는 만큼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가요? 한마디로 상대방에게 깊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의 성장과 성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듣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말과 느낌과 생각과 소원에 귀를 귀울이는 것입니다. 듣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제 설교를 잘 들으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 마음을 받아 주시는 겁니다. 열심히 듣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잘 들으려면 집중해야 합니다. 잘 듣는 사람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그리고 잘 들음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힙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듣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감상이 아니라 노동입니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렇듯 잘 듣고, 책임을 지며 상대방이 성장하도록 돕는 그 사랑은 생명을 줍니다. 살아나게 해 줍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줍니다. 똘똘 뭉쳐있던 피해의식에서 풀려나가고,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 친구가 되어 주고, 그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해 줍니다.
따라서 사랑은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기술입니다. 사랑은 감상이 아닌 이상 감정을 조절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화를 내고 서운해 하고 욕심내는 것은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멋대로 놔두면 파괴적이 됩니다.잘 훈련시키면 창조적인 에너지, 곧 사랑의 에너지로 바뀝니다. 그렇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은 못합니다. 할 수 있는 것만 성실하게 할 뿐입니다. 목사들에게는 메시야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자기가 다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훈련 없고 절제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만큼 파괴적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큰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커집니다. 진정한 사랑은 쓸데없는 것들을 비우고 소중한 것들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도우면 도울수록 내가 커집니다. 남을 돕는 것은 결국 자신을 돕는 일이 됩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치유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치유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유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줍니다.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줌으로써 나는 더 큰 선물을 받습니다.그것은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앞으로 4주간 우리는 사랑의 기술을 배울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자연과 세계를 사랑하는 방법,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받는 형벌은 어떤 것이 있는가요? 첫째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외적 조건에 매달리게 됩니다. 포장지만 보고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제아무리 거창해도 포장은 포장일 뿐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표피적으로 삽니다. 피상적이 됩니다. 겉돌며 삽니다. 따라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만남도, 공동체도 없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편을 가르고, 이편저편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고, 결국 공동체의 평화를 망가뜨립니다. 또 사랑하지 못하면 저마다의 가치를 지닌 고귀한 존재를 보지 못하고, 작품의 창조자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로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더 나아가 그 가치를 실현하게 하는 것,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 이 말씀에 의하면 생명을 얻게 하는 게 곧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주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 명은 산다,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는 죽음입니다. 내일 죽는 사람에게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준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재물이 그를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전제로 말씀드려야 하는 점은 우리는 억지로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작해야 흉내만 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무능력에 안주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합니다."(11절).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 생명의 열매로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지 달콤함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명의 확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중에 생명의 충만을 느끼게 되고, 그 생명의 충만을 주변과 나누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곧 영성이며,사랑입니다. 피리를 통해서 소리가 나가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나가면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우리 는 소리 자체가 아니라 피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소리가 우리를 통과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만 하면 소리가 음악을 만듭니다. 좋은 피리는 공명을 잘 시키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소리가 울릴 것입니다.
요한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2절).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생명의 충만이 자기의 삶을 통해서 주변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만난 것입 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여 사랑이 흘러나오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님은 '기쁨'을 나누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겠다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짜증스러워하고 불안해 하는 것은 사랑하지 못하거나 사랑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무감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이 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능력입니다. 교회에서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도 “사랑합니다!”입니다. 처음보는 권사님인데 “목사님, 사랑합니다!” 그러시는데 저분이 정말로 내가 누군줄 알고 저러시나 참 어색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오염된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증오와 저주를 퍼붓고, 사랑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 많이 보았습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어렵고, 참된 사랑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라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이웃을 참되게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해야 합니까?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라고 명하시니, 어쩌란 말입니까?
사랑이 불완전하고 내가 가진 사랑의 능력도 형편 없없어도 사랑하기를 회피하지 말라 하십니다. 행동한 만큼만 사랑입니다. 가능한 만큼이라도 사랑하라십니다. 100%의 사랑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5%밖에 사랑할 수 없다해도 지금 하라시는 겁니다. 그러면 5%만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고,머지 않아 7%로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으로써 우리는 더욱 깊이 예수님의 사랑과 연결됩니다.
문제는 우리는 사랑해야만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또한 우리가 행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음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며 가자는 겁니다. 주님께서 도우시는 만큼, 우리의 사랑은 참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께 뿌리를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깊어지지 않으면 사랑도 깊이 할 수 없습니다. 얕은 만큼 사랑도 얕아지기 때문이요, 표피적이고 감각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명한 H. E. Fosdick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불행은 위선이 아닙니다. 교회의 가장 큰 실수와 잘못은 신앙의 핵심인 형식너머 깊은 신앙의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현실의 문제를 잊고 환상적이고 유아기적인 퇴행으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환상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필요하는 의존도 아닙니다. 사랑은 나중에 보상을 받으려고 투자하는 것도, 사람의 마음을 얻어 내 사람 만들려는 희생이 아닙니다. 사랑은 낭만이나 느낌이 아니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집착과 사랑을 혼동하지 맙시다.
행동하는 만큼만 사랑입니다. 사 랑은 상대방에게 깊이 관심을 갖는 것,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말과 느낌과 생각과 소원에 귀를 귀울이는 것, 상대방의 성장과 성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상이 아니라 노동입니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생명을 줍니다.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해 줍니다. 사랑은 자신을 치유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치유합니다. 사람을 자유하게 합니다.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가장 좋은 선물을 줌으로써 나는 더 큰 선물을 받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신비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기술입니다. 세 살버릇 여든까지 간다지만, 인생을 바꾸려면 세 살버릇 여든에도 고쳐야 합니다. 한번 형성된 버릇 고치기 힘든것은 사실이나 고칠수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랑하며 살려면 고쳐야만 합니다. 나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사랑못하게 하는 습관들을 과감하게 고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꾸준히 기도하고 노력하다보면 자리를 잡고, 자리가 잡히면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자라면 확신이 생깁니다. 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도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 여러분을 통해서 얼마든지 풍성하게 흘를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아멘.
1. 개회기도
주님!
빈 마음, 간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습니다.
저희를 만나 주시옵소서.
세상근심 잊게 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감사와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령으로 감동시켜 주옵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2. 대중기도
사랑의 세계로 우리를 부르시어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예배하는 이 시간 주님앞에서 저희들의 마음을 엽니다.
저희들 마음 중심에 오셔서 다스려 주옵소서.
마음 속속들이 당신의 사랑이 스며들게 하옵소서.
주님께 대한 저희 사랑이 깊어지게 하소서.
그 사랑이 깊어져 주님을 아는 지식이 되게 하시고
그 사랑이 더 분명해지게 하시고 물이 바다에 넘치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넘치게 하옵소서.
자비로우신 주님,
모태로부터 우리를 사랑 받는 자로 부르시고,
인생의 어려운 고비길마다 사랑의 손길로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죄악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리지 말게 하시고,
생의 한복판에서 주의 형상 회복하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세상에 속한 헛된 욕심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충만하게 하사
사랑의 능력자들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게 하옵소서.
빈마음으로 찾아 나온 저희들에게
오늘도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시고
거룩한 소명으로 불타오르게 하시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맡기옵고
우리를 미움과 증오와 죄의 무기력에서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